1952 ~ 1965
제1장
대한민국 최초 민영 강원탄광의 탄생과 성장
01.
선각자 정인욱의 원대한 꿈과
강원탄광 탄생기
조국 건설의 과제와 청년 정인욱의 행보
와세다대학교 채광야금학과를 졸업한 정인욱은 미 군정청 석탄과장, 대한석탄공사 초대 생산이사 등을 역임한 정통 기술관료였다. 그러나 그는 경직된 관료 조직으로는 석탄산업 부흥을 이끌기 어렵다고 판단해 1952년 화태탄광의 광구 개발권을 획득했다. 그의 후배 최형섭 전 장관은 이에 대해 “와세다는 독특한 학풍을 지니고 있었어요. 정선배는 그런 기질을 이어받아서 독자적인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거 아닌가 싶어요.”라는 해석을 남겼다.
역사의 그날, 강원탄광 개광
정인욱 회장은 철암에서 밤낮없이 탄맥을 찾아 헤맸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중 지질조사 길잡이였던 김병용 씨와 ‘삼척 무연탄 조사보고서’를 만나며 돌파구를 찾았다. 두 사람은 화태탄광 5구를 첫 시추지로 선정해 구식 도구로 굴착한 끝에 확실한 탄선을 발견했다. 이어 하천 건너편 부지에서도 양질의 광맥이 쏟아졌다. 1952년 11월 20일, 강원탄광을 승승장구하게 만든 노다지 광맥이 탄생한 순간이자 개광기념일이다. 강원탄광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생산체제에 돌입했다.
주변 탄광의 벤치마킹 탄광
강원탄광은 개광 초기 연평균 53%라는 경이로운 증산 행진을 이어갔다. 비결은 기계를 잘 아는 경영자 덕분이었다. 타 탄광이 수작업에 의존할 때 강원탄광은 최신 기계와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했고 덕분에 대한석탄공사보다 굴진 속도가 7배나 빨랐다.
직원 복지 역시 선진적이었다. 노임 체불 없이 타 탄광보다 50%나 많은 임금을 지급했으며 ‘문화주택’을 표방하는 최신형 단독주택 사택촌을 신축했다. 1960년 12월 발행된 ‘사상계’는 이 풍경을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수를 중심으로 비스듬히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설계로 꾸며진
468호에 달하는 문화주택형의 광부 사택이었다. 대뜸 이들 생활이 퍽 윤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외에도 광목과 쌀 배급, 자녀 장학금 지급 등 전폭적인 직원 제일주의 복지를 실현하며 주변 탄광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02.
시대를 한발 앞서갔던
그 회사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 수직갱 착공과 실현
강원탄광은 1962년 국내 최초로 지하 530m의 제1수직갱을 완공했다. 기계공업 인프라가 전무한 황무지에서 독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기술력과 자본으로 이뤄낸 대역사였다. 훗날 정도원 회장(당시 강원산업 사장)은 이에 대해 “선친께서는 석탄 팔아 마련한 수십억 원을 수직갱 파는 데 전부 투자했습니다. ‘나는 민족 자본가다.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우리 자본으로 해내야 한다.’는 신념을 마음속에 깊숙이 품고 계셨던 것이지요.”라고 회고했다. 강원탄광 기술진은 전 세계 논문을 섭렵하고 기계 부품을 직접 설계하며 4년여 만에 공사를 마쳤고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총 4차에 걸쳐 수직갱 공사를 진행하며 탄전 심부화를 선도했다.
| 내역 | 착공 시점 | 완공 시점 |
|---|---|---|
| 제1 수직갱 | 1958년 5월 착공 | 1962년 6월 완공 |
| 제2 수직갱 | 1959년 5월 착공 | 1963년 4월 완공 |
| 제3 수직갱 | 1973년 1월 착공 | 1978년 2월 완공 |
| 제3 수직갱 연장공사 | 1985년 착공 | 1987년 완공 |
국내 탄광 심부화 선도기업
강원탄광이 수직갱 건설에 성공하자 대한석탄공사를 비롯해 함태탄광, 삼척탄좌, 동원탄좌 등 여러 민영탄광이 그 뒤를 따랐다. 석탄층이 지하 깊숙이 위치한 우리나라 환경에서 수직갱 건설은 깊은 곳의 석탄까지 채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국가 에너지 확보 전략에 일조함으로써 민족 기업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 서울사무소와 고려병원 앞 본사 건물 마련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서울지역 연락사무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소공동에서 한 평 반 크기로 시작한 서울사무소는 종로3가, 북창동을 거쳐 확대 이전되었다. 1961년에는 신문로 고려병원 맞은편의 옛 유한양행 건물을 인수하여 서울 본사를 설치했는데 이 공간은 1966년 ‘강원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한 이후에도 수십 년간 본사 둥지로 사용되었다.
시대를 앞선 기술경영 철학과 삼표연탄의 영광
강원탄광의 제1원칙은 ‘기술 제일’이었다. 정인욱 회장은 장비를 해체하고 연구하여 탄광용 기계 설비를 직접 제작하도록 독려했고, 강원탄광 옆 기계제작소는 권양기, 로카쇼벨 등을 제작해 주변 탄광에 공급하는 명물이 되었다. 이 제작소는 이후 1963년 강원제작소로 확대되었다. 1964년 입사한 한희승 전 사장은 “제가 일하게 될 강원제작소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물리실험실, 주물용 모래 실험실 등 연구에 필요한 온갖 설비와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더군요.”라고 묘사했다.
강원탄광 엔지니어들은 연구 끝에 하루 100만 개의 연탄을 찍어내는 전자동 고속 윤전기 개발에 성공했고, 이는 ‘삼표연탄’의 신화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때 사용하기 시작한 ‘삼표’라는 상호는 기술경영을 통한 도약의 모범사례가 되었으며, 1960년에 획득한 ‘양면요형연탄 특허’는 그 시대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남아 있다.
1966 ~ 1988
제2장
강원산업그룹 체제 확립과 사업다각화의 방향성
01.
강원산업주식회사 출범과
사업다각화의 줄기
사명의 정착, 강원과 삼표
1952년 설립된 ‘강원탄광’은 실적 호황기를 맞이한 1960년 ‘주식회사 강원탄광’으로, 연탄사업과 수송업이 확대된 1966년에는 통합 명칭인 ‘강원산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한편, 1961년 가동을 시작한 ‘삼표연탄’의 ‘삼표(三標)’라는 상호는 정인욱 회장이 직접 고안했다. 천·지·인의 조화를 뜻하는 숫자 3과 가장 안정적인 형태인 삼각형을 연상시키는 이 명칭은 골재, 레미콘, 중공업 등 사업을 개척할 때마다 브랜드로 정착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현금이 가장 많았던 회사
1966년 10월 급격한 한파로 연료 공급부족이 ‘파동’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언론은 “연탄파동이 막바지에 올라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부르는 게 값이 돼 버려 당국의 연탄수급 정책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라고 긴박함을 전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경제관계회의를 소집할 정도였다. 이때 삼표연탄은 전자동 고속윤전기와 자체 수송체계를 전격 가동해 파동 해소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로 인해 현금으로 선입금되면서 강원산업은 1960년대 내내 ‘국내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가진 기업’으로 알려졌고, ‘三標’는 국가대표 브랜드로 각인되었다.
석탄사업 이후에 대한 고민과 기초건자재 사업분야로의 다각화 걸음
정인욱 회장은 탄광과 연탄 사업의 한계 및 계절적 비수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업다각화를 검토했다. 이에 탄광의 잉여 인력과 자재를 활용하기 좋고 비수기(봄~가을)를 채울 수 있는 골재사업을 1961년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삼표산업’의 모태가 되었다. 유관 분야로의 다각화는 계속되어 1977년 레미콘 사업(성수, 풍납공장 등)에 진출했고, 1974년 전문건설업 진출, 1986년 석산개발(봉재, 남양 등) 설립을 통해 한발 앞선 인프라를 구축해 나갔다.
| 연도 | 확대 내역 |
|---|---|
| 1977 | · 강원산업 레미콘 성수 및 풍납공장 등록 |
| 1979 | · 강원산업 군산공장 등록 |
| 1982 | · 강원산업 레미콘 인천공장 등록 |
| 1983 | · 강원산업 레미콘 안양공장 등록 |
| 1985 | · 강원산업 삼표레미콘 반월공장 등록 |
| 1987 | · 강원산업 레미콘 양주공장 등록 |
| 1988 |
· 강원산업 레미콘 사업부, 삼표산업에 영업 양도 · 삼안레미콘㈜ 설립(안양) · 성수 및 풍납공장 삼안레미콘㈜으로 분리 · 삼표레미콘㈜ 설립(풍납 및 성수) |
종합에너지 기업을 향한 행보
주탄종유(主炭從油)와 주유종탄(主油從炭) 사이에서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흔들리던 시절, 강원산업은 종합에너지 기업을 지향했다. 석유사업(수유저유소, 망우주유소)과 LPG 사업(상봉충전소, 구로저장소) 인프라를 바탕으로 1980년 ‘㈜삼표종합가스(現 삼표에너지)’를 설립했다. 1984년에는 지분 투자를 통해 ‘㈜강남도시가스’를 설립해 구로구 일대에 도시가스를 공급했으며, 1987년 국내 최초로 도시가스 연료를 천연가스(LNG)로 전환했다. 이로써 1988년 기준 강원산업그룹은 삼표산업, 삼표제작소 등 총 7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02.
국내 최고
전기로 제강메이커를 향한 꿈
4대 핵심공장 건설 프로젝트와 강원산업의 역할
1970년대 정부는 중공업 육성 종합시책에 따라 4대 핵심공장 건설을 추진했고, 강원산업은 주물선 공장 건설 및 운영의 적임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사업을 진행할 경우 금융 비용 등으로 인해 원가 경쟁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차관이나 은행차입금의 금리를 고려해 보면 우리처럼 민간에서 진행할 경우 국제 표준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에 선철을 공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강원산업은 포항제철이 사업을 맡도록 정부에 역제안하고 주물선 사업을 포기했다. 대신 창업주 정인욱 회장은 철강산업에 대한 열정으로 전기로를 이용한 주물공장 건설이라는 대안을 확정했다.
제1호 전기로공장 준공과 기업공개 단행
1973년 3월, 강원산업의 제1호 전기로가 포항제철의 최초 용광로보다 4개월 앞세 준공되었다. 포항제철 맞은편에 25톤 규모로 완성된 공장은 초기에는 압연용 롤 등을 포항제철에 납품했고, 점차 블룸(Bloom : 철광석을 녹여서 얻은 쇠를 응결하여 만든 쇠 덩어리) 공급의 이점을 살려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했다. 특히 1978년 제3압연공장 준공을 전후로 철도용 레일, 시트파일 등을 생산하며 대표적인 제강메이커로 발돋움했다. 대규모 설비 확장을 위해 1976년 3월에는 기업 공개를 시행하며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국내 최고 전기로 제강메이커를 향한 확장 행보
강원산업은 철강 분야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중공업 부문 시설을 확장했다. 1975년 제1연속주조 설비를 시작으로 1981년 제2설비, 1989년 제3연속주조 라인까지 무리를 감수하며 구축해 나갔다.
| 시점 | 내역 |
|---|---|
| 1974년 8월 | 제2 압연공장 및 25톤 제강 전기로 기공 |
| 1975년 4월 | 제1 연속주조 설비(CCM) 준공 |
| 1975년 9월 | 제강 전기로(60톤) 준공 |
| 1978년 9월 | 제3 압연공장 준공 |
| 1981년 1월 | 제2 연속주조설비(CCM) 준공 |
| 1984년 11월 | 제강 전기로(60톤) 준공 |
| 1986년 7월 | 중기공장 준공 |
| 1989년 11월 | 제3 연속주조 설비(CCM) 준공 |
| 1992년 8월 | 제강 전기로(100톤) 및 블룸 연속주조기 준공(제강능력 240만 톤) |
| 1993년 12월 | H빔 공장 준공(압연 생산능력 275만 톤) |
| 1996년 12월 | 제강 전기로(130톤) 준공 |
| 1997년 6월 | 중형강 공장 준공(압연 생산능력 340만 톤) |
이처럼 지속적인 시설 투자를 단행한 강원산업은 1990년대 들어 형강류와 특수강 등 폭넓은 고부가가치 포트폴리오를 갖춘 국내 첫손의 제강업체로 성장했다.
환경자원 재활용사업 진출
원재료인 고철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1981년 한국슈레다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폐차를 제강 원료로 가공해 포항공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삼표그룹 역사에서 환경자원 재활용 사업 진출의 기점이 되었다. 또한 재래식 도구로 분해하던 과거 고물상 형태에서 벗어나 현대식 파쇄 설비를 갖춤으로써 대한민국 산업사에서 국내 현대식 폐차장 시대의 서막을 연 계기가 되었다.
1989 ~ 1999
제3장
현대적 기업으로의 탈바꿈과 강렬한 빛 뒤 그림자
01.
2세대 지도체제 출범과
경영구조 개편
2세대 경영체제로의 전환
강원산업은 철강사업을 비롯해 건자재, 에너지 등 다양한 영역으로 규모를 키웠으나, 이질적인 업종들의 종합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1988년 7개 주요 사업의 개별 법인 독립을 추진하여 강원산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구조로 재편했다. 이어 1989년 정인욱 회장이 퇴진하며 장남 정문원 회장과 정도원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2세 경영체제를 정립했다. 또한, 오랜 현장 경험을 가진 ‘공채 1기’ 인원들을 계열사 최고책임자로 선임하는 전문경영체제를 구축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한 걸음 앞선 석산 확보와 골재사업 확장
1990년대를 앞두고 한강골재 채취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언론은 “수도권 1500여만 명의 상수원인 팔당호의 준설 공사 및 골재채취계획을 둘러싸고 수질오염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강원산업은 이 분위기를 한발 앞서 감지하고 석산 개발에 뛰어들어 1986년 봉재석산개발과 남양석산개발을, 1989년 일산광업과 남부개발을 설립해 대규모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선대회장의 혜안은 관계자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선대회장님은 일본의 건설 사이클을 면밀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건설 붐이 언젠가는 재건축 붐이 될 거고, 이게 돌고 돌면서 건설 호황기가 사이클을 두고 찾아올 거라고 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적인 측면에서도, 또 국가에 대한 기여의 측면에서도
석산골재 대단지를 갖출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이처럼 놀라운 혜안 덕분에 강원산업 골재사업 부문은 이후 수도권 전역의 수요를 커버하며 동종업계의 독보적인 강자로 자리매김해 나갈 수 있었다.
레미콘 사업 부문의 조직통합과 고객관리 안정성 확보
1988년 독립 법인화 과정에서 레미콘 사업부는 거점별로 분리(삼안, 군산, 삼표레미콘)되었으나, 컨트롤 타워 부재로 일관성 없는 영업의 한계에 부딪혔다. 한 관계자는 “1990년대 초중반에는 시멘트 공급 부족이 아주 흔한 일이었어요. 다만 회사 경영진 입장에서는 그런 현장 한두 곳에서 가격 잘 받는다고 좋을 게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대형 고객사 관리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라며 당시 곤란을 전했다. 이에 1993년 한 해 동안 계열 레미콘사들을 삼표산업으로 흡수 통합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주먹구구식 영업에서 벗어나 일관된 영업정책 아래 대형 거래처와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시장 내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강원탄광 폐광과 연탄사업의 정리
회사의 젖줄이던 탄광과 연탄 사업은 1980년대 중반을 고비로 적자로 돌아섰다. 연탄사업은 1986년 6억 7,000만 개 판매로 정점을 찍은 후 도시가스 등에 밀려 수요가 급격히 격감했다. 탄광 역시 임금 폭등으로 채산성을 맞추기 어려워졌다. 결국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에 따라 강원탄광은 1993년 3월 시설을 해체하고 철수하며 개광 41년 만에 채탄작업을 공식 종료했다. 이후 자사 원료 수급이 중단된 연탄공장들도 서강(1992년), 이문동(1992년), 망우(1995년), 수색공장이 차례로 문을 닫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02.
중공업 사업 확장에 대한
집념과 외환위기 속 시련
전기로 제강사업 일관 생산라인 완성
1970년대 중공업 사업을 개시한 강원산업은 고부가가치 제품군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증설을 추진했다. 특히 2세 경영체제 출범 이후 더욱 공격적으로 투자하여 1989년 제3 연속주조설비, 1992년 블룸 연속주조기를 준공하며 반제품 및 원료 자체 생산능력을 완비했다. 이어 1993년 H빔 공장, 1997년 중형강 공장 증설을 완료했다. 이로써 전기로부터 연속주조설비, 완제품을 생산하는 압연공장까지 완비하며 전기로 제강사업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 1990년대 들어 일관 생산라인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제강 전기로 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글로벌 시장 진출 노력
수출 활성화의 물꼬는 삼표제작소가 텄으며, 중공업 사업 참여가 본격화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미국에 주강 제품을 수출하고 중동에 소형철근을 공급하는 등 수출 역군으로 부상했다. 1980년대에는 수입에 의존하던 철도레일 국산화에 성공해 수천만 달러의 수출을 창출했고 동남아 플랜트 수출 기록도 세웠다. 특히 국내 유일의 생산업체로서 1986년부터 수출을 시작한 ‘시트 파일’은 글로벌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은 대표 사례다. 1988년 이후로는 일본 강원상사 설립, LA사무소 법인 격상, 홍콩 강원아세아유한공사 설립(1993년) 등을 통해 미국, 홍콩, 일본을 아우르는 국제적 네트워크망을 완성했다.
생존의 갈림길 위에서
강원산업은 제강사업에서 최고를 지향하며 증설과 설비 확장을 위해 유무상 증자 및 전환사채 발행 등으로 투자금을 마련했다.
| 시점 | 내역 |
|---|---|
| 1990년 2월 | · 전환사채 200억 원 발행 |
| 1990년 5월 | · 유상증자 109억 원(자본금 531억 원) |
| 1991년 10월 | · 해외전환사채 발행(4,000만 달러) |
| 1996년 7월 | · 자산재평가 실시(평가차액 2,894억 원) |
| 1996년 8월 | · 해외신주인수권부 사채 발행 |
| 1997년 6월 | · 전환사채 전환 및 해외신주인수권부 사채 신주인수권 행사로 인한 자본금 증가 191억 원(자본금 652억 원) |
그러나 1995년부터 글로벌 철강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고 국내 철강 시장이 공급 과잉으로 돌아서면서 경영지표가 악화되었다. 여기에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태풍이 몰아치며 큰 타격을 입었다.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연탄마저 1980년대에 들어서면 사양산업이 됐잖아요. (중략) 1990년대 들어서면 ‘특수강’에 주목해서
또 새롭게 투자를 한 거죠. 이 투자 시기가 정말 운이 안 좋게도 외환위기 때랑 맞물렸던 거에요.
생각하지도 못한 태풍이, 어, 어, 하는 사이에 몰아치니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이 다 맞아야 했어요.”
특히 포항시 남구 장흥동 부지 구입 등 막대한 출혈을 감수한 1997년 중형강 공장 완공이 자금난에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자금 여유를 갖추지 못했던 강원산업그룹은 1998년 조흥은행과 워크아웃 약정을 체결하고, 강원산업과 삼표산업 중심의 구조조정 작업에 돌입했다.
2000 ~ 2014
제4장
삼표 시대 선언과 삼표그룹 체제의 안착
01.
그룹 재건기,
삼표그룹으로 새로운 출발
워크아웃 대상기업 선정과 중공업 및 도시가스업의 정리
IMF 외환위기의 풍랑 속에 강원산업그룹은 1998년 7월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지정되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철강은 강원산업으로, 기초건자재와 에너지는 삼표산업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핵심 주력이던 중공업 부문은 매각 주체가 나타나지 않아 전체를 정리하게 되었고, 2000년 3월 인천제철(現 현대제철)과의 합병 절차가 완료되었다. 강남도시가스 지분은 1999년 8월 세아그룹에 양도하며 에너지 사업을 종료했고, 기술경영의 상징이던 삼표제작소 역시 인천제철에 매각된 후 여러 사명 변경을 거쳐 2009년 최종 청산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룹 재건 리더십의 정립 통한 새로운 반석 놓기
채권단은 임대 수익률을 근거로 삼표산업의 석산골재 사업장 매각을 권고했다. 그러나 정도원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한 관계자는 “삼표산업만 보자면 사실 처음부터 워크아웃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어요. 흔히 말하는 폼 나는 사업은 아닐지라도 수익성이 괜찮았거든요.”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정도원 회장은 오히려 사재 165억 원을 투입해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임직원 또한 급여 동결과 자산 매각 등 눈물겨운 고통 분담에 동참하며 사업 기반을 지켜냈다. 구조조정 마무리 단계인 2000년 3월, 정도원 회장은 성수동 공장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강력한 오너십을 바탕으로 현장경영에 나서며 조직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본사 건물 이전과 광화문 시대의 개막
2000년 수도권 아파트 건설 붐에 힘입어 삼표산업은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당초 일정보다 1년 반 앞당긴 2002년 4월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워크아웃 탈출 후 회사는 건자재, 철도, 물류 중심의 알짜 그룹체제를 다시 형성해 나갔다.
“경영진이 회사의 과거 위상을 회복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성수동 공장 부지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던 거죠. 그래서 새로운 사옥 건물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판단에 따라 2003년 3월 종로구 광화문의 이마빌딩과 인근 코리아빌딩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서울 중심가로의 이전은 회사의 인지도를 높이고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삼표 CI 선포와 ‘삼표 시대’ 선언
삼표는 워크아웃의 상처를 씻어내고 새로운 도약을 선언하기 위해 2004년 7월 CI 선포식을 개최했다. 새 CI 정립은 과거의 상처를 극복했다는 메시지를 시각화하고, 지속 가능한 경영 기반을 회복했음을 대외에 알려 신뢰를 회복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울러 중공업을 정리하고 기초건자재 중심으로 재편된 삼표의 정체성을 공식화하는 장치였다. 기존의 한자 ‘三’ 형태에서 영문 ‘SAMPYO’ 워드마크와 스카이블루 색상을 적용한 현대적 디자인으로 바뀐 새 CI는 단순한 개편을 넘어 사이버 물류와 환경자원 재활용 등 신사업에 도전하며 건설엔지니어링 전문회사로 도약하겠다는 삼표 시대의 선언이었다.
02.
삼표그룹 체제의
지속성장 기반 마련
철도사업 전성시대 개막
삼표는 1990년대부터 철도분기기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경부고속철도 1단계 사업에 참여했으나, 2단계 구간이 콘크리트 궤도로 결정되면서 분기기 국산화가 시급해졌다. 이에 2002년 글로벌 선도기업 ‘보슬로고지퍼’와 기술협약을 맺고 개발에 착수하여 2009년 11월 경부고속철도 2단계 구간에 순수 국내 기술 고속분기기를 부설했다. 이는 향후 호남고속철도 건설 시 전 구간 국산화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토대가 되었다.
또한 삼표레일웨이는 한국철도시설공단과 공동 연구하여 PSTS 공법의 신기술 등록과 상용화를 주도하며 국내 철도 궤도시공 기술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를 바탕으로 2006년 전라선 최초 시험부설, 2011년 중앙성 망미터널 시공, 2014년 동해남부선 및 경전선 공사를 수행했으며, 2013년에는 제천에 국내 최초 PST 시스템 전용 생산라인을 신설했다. 후발주자였던 삼표레일웨이는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2006년부터 2013년까지 8년 연속 철도궤도 시공능력평가 1위를 차지하며 부동의 시장 선두주자로 발돋움했다.
플라이애시 업계 1위 기업으로 발돋움
삼표는 1986년 국내 최초로 발전 폐기물이던 석탄재를 시멘트 대체제인 친환경 건축 소재 ‘플라이애시’로 재활용하기 시작했다. 2001년 당진 F/A 공장을 가동하며 독자 생산체제를 구축한 분체사업부는 당시 그룹 내 손 꼽히는 우량 사업부였다.
"그때만 해도 석탄재를 수거할 때 그쪽에서 우리한테 돈을 주고 수거를 요청하고는 했어요.
이후 부산물 원료에 대한 공급비용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 가격도 시멘트에 비하면 워낙 낮으니까요.
원가가 낮으니, 마진은 높을 수밖에 없고, 이런 구조이니 당연히 수익성이 높았던 거죠.”
삼표는 초기 건설사들의 거부감을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검증 데이터로 극복해 냈으며, 2003년 호남 공장 가동, 2008년 경원소재㈜ 인수를 통한 보령 공장 확보로 전국 생산체제를 완성하며 연간 210만 톤 생산 능력을 갖춘 업계 부동의 1위로 도약했다.
종합 골재채취 전문기업으로 도약
2001년 신설된 해사사업소는 초기 후발주자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2004년 인천 앞바다 모래 채취 중단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과감한 선박 투자와 체질 개선을 단행했다. 한 관계자는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기존에 사용하던 예인선을 개조해 크기를 2배로 늘렸어요. 선원들의 급여체계도 인센티브제로 바꿔서 그전에는 한 달에 8회전만 하던 것을 월 15회전까지 향상시켰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를 통해 바닷모래 채취량과 허가량을 추가 확보하며 종합 골재채취 전문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더불어 수도권 전역에 동서남북 공급망을 구축했던 석산골재 사업을 2000년대 들어 충청·경상권까지 확장하며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공고히 했다.
| 가동 시점 | 확대 사업장 |
|---|---|
| 2005 | 연천석산(NRC) |
| 2006 | 광주사업장(삼표산업) |
| 2007 | 동북사업장(삼표산업) |
| 2008 | 포천사업장(삼표산업) |
| 2010 | 용인사업장(삼표산업) |
| 2013 | 서세종사업장(신대원) |
| 2014 | 동부산사업장(신대원) |
삼표는 철저한 품질관리로 2006년 화성 석산이 국내 최초로 골재 한국산업표준(KS) 인증을 취득한 이래 전 사업장이 KS 인증을 획득하며 전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가 공인 고품질 골재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03.
기술 삼표의
전통 확립
그룹 재건기의 핵심 캐쉬카우, 레미콘
구조조정으로 조직의 30%를 감축하던 그룹 재건기에 레미콘 사업은 삼표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2000년 주차장법 개정으로 다가구주택 건설 붐이 일면서 전문건설업체의 레미콘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풍납공장 같은 경우 당시 물량의 60% 이상이 전문건설업체 물량이었어요. 수요가 넘치니까
우리 쪽에 먼저 공급해 달라고 이 사람들이 오히려 안달이 나는 상황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선 현금, 100% 단가 결제'가 원칙이 됐어요. 현금 수입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였죠.”
이에 삼표는 2001년 서부공장, 2002년 아산공장, 2003년 송도공장을 시작으로 2기 신도시 및 재건축 호황에 맞춰 전국으로 공급망을 확대했다. 지속적인 증설 결과, 2014년 기준 전국 30곳이 넘는 공장을 확보하며 레미콘 부문 매출 5,000억 원 시대를 열었다.
| 가동 시점 | 확대 사업장 |
|---|---|
| 2001 | 서부공장 |
| 2002 | 아산공장 |
| 2003 | 송도공장 |
| 2005 | 당진·평택·원주공장 |
| 2007 | 용인공장 |
| 2010 | 오산공장 |
| 2011 | 청원공장 |
| 2011 | 송산2공장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건설사업 위한 임시공장) |
| 2011 | 남동레미콘 연천공장 |
| 2013 | 타워레미콘 동서울공장 |
기술삼표의 전통 계승
경쟁사보다 앞선 기술력으로 독자적인 경쟁력을 만든다는 ‘기술경영’은 삼표의 오랜 전통이다. 전문 엔지니얼이 기업을 표방한 삼표는 두 곳의 연구소를 통해 기술개발에 주력했다. 1993년 업계 최초로 설립된 ‘삼표기술연구소’는 특수 콘크리트 개발에 힘썼고, 2001년 설립된 ‘철도기술연구소’는 전문가 영입과 수백 건의 특허 획득을 통해 철도 제품 및 시공 기술 국산화를 선도했다.
품질관리 측면의 투자도 과감했다. 2008년 레미콘품질팀과 골재품질팀을 하나로 합친 통합 품질경영체제를 구축했는데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큰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품질 데이터를 구매 정책에 직접 반영하는 체계가 마련되었어요.
특히 시멘트 같은 경우는 7개 시멘트 회사 제품을 매월 평가했죠.
KS에 없거나 혹은 그보다 높은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해서 그걸 구매에 반영하기 시작한 거예요.”
통합 품질관리팀 및 본부 개소 이후 주요 성과
-
1
레미콘 원재료
품질 데이터의 구매 반영 -
2
레미콘 자동 측정 설비
검증을 위한 시험 업무 -
3
시험성적서 발행을 통한 매출 생성
(시멘트 및 관련 제품 5개,
골재 및 관련 제품 16개 항목) -
4
KCL 주관 ‘콘크리트 압축강도
숙련도 시험용 시료 제작 및
적절성 평가’ 위탁업무 수행
2010년에는 화성에 ‘통합품질실험센터’를 설립해 KS보다 엄격한 삼표만의 자체품질기준인 SKS를 정립해 나갔다. 이처럼 민간 부문의 표준화를 주도하며 품질경영 확산에 앞장선 결과, 한국품질만족지수 7년 연속 1위에 오르며 시장에서 확고한 위상을 굳혔다.
04.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서
콘크리트 공사업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 단행
새로운 그룹체제를 안착시킨 삼표는 미래 먹거리로 PHC파일 시장에 주목했다. 건설산업의 대형화 추세에 맞춰 대구경 파일의 가능성을 본 삼표는 2009년 제천에 국내 최초로 대구경 파일 생산 공장을 신설했다. 일본 토야아사노사와 제휴해 관련 기술을 도입했으나, 초기 미증유의 현장에서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국내에는 아예 없던 공법이잖아요? 초기에는 파일이 깨지기도 하고, 문제가 많았어요.
분석해 보니 500~600mm급 중구경과 달리 이게 중량이 더 나가니까 크레인이 콘트롤하기 어려웠던 거에요.
또 일본과 우리는 지질이 다르니까 항타기를 할 때 그 운용에 있어서 방법이 조금 달라야 했던 거죠.”
이에 삼표는 매뉴얼 배포와 반복 실험으로 최적의 제조 조건을 확립했고, 2011년에는 포스코건설과 공동으로 세계 최초 고강도(110MPa 이상) PHC 파일 상용화에 성공했다. 더불어 탈현장 건설(OSC) 흐름에 맞춰 2011년 동아건설산업 청주공장을 인수하며 프리캐스트(PC) 사업에 진출, 기술력 확보와 포항 PC공장 가동을 통해 사업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슬래그사업의 시작과 분체신사업팀 출범
남부지역과 달리 슬래그시멘트 사용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중부권 시장의 틈새를 내다보고 삼표는 2012년 당진슬래그 공장을 준공했다.
"회사가 삼표라는 이름으로 그룹 차원에서 대외에서 명성을 얻게 되고,
다시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 건, 이때쯤부터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전에 플라이애시도 그랬지만 여기에 슬래그라는 새로운 전력까지 더해지면서 원재료비 부담 없이
고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고, 또 사업부서 간에 본격적으로 시너지를 내기 시작한 거죠.”
삼표는 여기서 더 나아가 2013년 대림산업과 플라이애시, 고로슬래그 미분말을 활용한 ‘시멘트 저감형 콘크리트 제조기술’을 공동 개발했고, 2014년 천안슬래그 공장을 신설해 점유율을 높였다. 같은 해 신설된 ‘분체신사업팀’은 제도 개선 노력을 통해 친환경 분체 원료를 레미콘에 일정 비율 투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성취하며 업계 선도기업으로 성장했다.
몰탈 시장에 던진 과감한 도전장
삼표는 공기 단축과 인건비 절감 효과로 현장 선호도가 높은 ‘드라이몰탈(물만 부으면 바로 시공이 가능한 즉석시멘트)’의 성장성에 주목했다. 2011년부터 관련 업계 인재를 영입하며 진출을 준비했으나, 경쟁업체가 시장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어 사내 우려도 컸다.
"단일회사의 브랜드가 시장 전체의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죠. 어쩌면 우려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업이란 게 어느 회사에서나 그럴 거에요. 결국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와 비전이 있어야 하죠.
몰탈 시장 진출은,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구상을 그림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실행해 버린 경우라서
우려도 있긴 했지만, 길게 가지는 않았어요.”
삼표는 연간 500여 곳의 소비자를 방문해 의견을 수집했고 삼표기술연구소의 끊임없는 테스트를 거쳐 2013년 독자적인 최적 배합비 특허를 취득했다. 그 결과 2014년 11월 연산 50만 톤 규모의 화성 드라이몰탈 공장을 완공하며 시장 안착에 성공했다.